“인간에게 변화란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다"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변화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나의 개인적인 것만 해도 수 없이 많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대신에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인간에게 변화는 정말 그렇게 어려워야만 하는 것인가?"

잠시 망설여지긴 하지만, 이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이 질문에 까지 "그렇다"라고 대답해야한다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릴테니 말이다. 그렇다. 인간의 변화란 것이 반드시 어려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끔씩은 남들이 죽도록 어려워하는 일들도 쉽게쉽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나 자신은 평생토록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다가 끝낼 법한 일도, 독하게 마음 먹고 단번에 해치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의 변화란 것이 꼭 그렇게 어려워야만 하는 법은 아닌 것 같다. 단지 내가 모르고 있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 뭔가가 무엇일지 진지한 탐구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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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백만 가지도 넘지만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무수한 방법 중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제대로 골라낼 수 있다. 원리는 무시하고 방법만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문제가 생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2009년부터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인상 깊은 사건이 있었다. 원더걸스가 빌보드 HOT100 차트에 진입했던 것이다. 아시아 가수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녀들과 프로듀서 박진영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여, 좌충우돌 힘겨운 도전기를 소개했다. 또한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비(RAIN)는 영화 '닌자 어쌔신'의 주인공을 맡으며, 국내 배우 최초로 헐리우드의 단독 주연을 맡는 대기록을 세웠다. 연예계뿐 만이 아니다. 이미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피겨여왕 김연아는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감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록으로 보자면 금메달을 한 개 더 걸어도 될 법한 기록이었다. 앞으로 더더욱 커다란 성장과 성공의 길을 걷겠지만, 이들은 이미 큰 성공을 이루어 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러한 기록,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례를 사례로만 기억하길 원치 않는다.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는 사례를 바탕으로 한 '모델'을 낳게 한다. 누군가의 성공 사례를 다른 사람들도 따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모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변화를 가장 현대적인 맥락으로 표현한 말이 아마도 '자기계발'일 것이다. 치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기계발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가고만 있다. 서점엔 자기계발 코너가 따로 있으며, 그 코너에는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삼아서 책을 읽는 나조차도 소화하기에 벅찰 정도의 엄청난 양이다. 그런데, 바로 이 책들이 담고 있는 내용 대부분은 앞서 설명한 사례와 모델에 해당한다. 자기계발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불만을 토로한다. 바로, 대부분의 자기계발 서적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이며,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읽다보면 나중에는 그 내용에 식상하고, 더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내용이긴 하나, 자신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누군가는 분명 그 모델을 가지고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 아니, 통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통할 때까지 그것을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풀기 어려운 의문점들이 너무나 많이 만나게 된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모델은 그 사람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모델이 분명 의미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자료로 활용하려 하기보다는 마치 누구에게나 다 통하는 궁극의 솔루션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성공확률이 낮을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클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근사한 옷맵시를 뽐내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실패는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델에 앞서 ‘원리’이다. 모델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다. 원리는 말 그대로 원리일 뿐, 그것이 방법까지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원리는 수많은 모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만들어진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원리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던 모르던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테니 말이다. 여러 모델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들, 그것들을 추출하여 정제해 낸 것을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원리마다 각각 그 수준이 다를 것이다. 얼마나 순도가 높냐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 모델들의 공통점에서 추출한 원리가 있는가하면, 그러한 원리들이 가진 공통점을 뽑아 만든 ‘원리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원리의 원리의 원리’도 생각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변화와 성장, 성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상위의 원리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보다 높은 차원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모델을 골라낼 때, 제대로 된 것을 고를 수 있다. 물리학의 법칙과 같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이 있다. 세상은 이러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직 인간의 변화에만 이러한 법칙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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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제를 계속 반복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가 너무 우둔하여 해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 켄 윌버 Ken Wilber

나는 지금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노트북을 올려 놓은 책상, 이것들은 일종의 구조물이다. 의자라는 구조물이 있어 나는 그곳에 앉을 수가 있고, 책상이라는 구조물이 있어 나는 그 곳에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의자와 책상은 각기 자기만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모양에 맞추어 나는 앉을 수가 있고, 그 모양에 맞추어 노트북을 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의자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피라미드 모양이라면 나는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없다. 책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자나 책상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동안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모양에 의해 지배받는다. 의자와 책상이라는 구조물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의자가 우리를 거기에 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책상이 노트북을 거기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제 스케일을 좀 더 크게 가져가 보자. 이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방이다. 이 방에는 책장이 있고,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적절하게 배치가 되어있다. 그러한 가구 배치는 또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가구배치는 그 방 안에서 나의 동선을 결정한다. 같은 방안의 공간이지만 가구가 놓여있는 곳에는 내 몸을 들이밀 수가 없다. 나는 가구를 피해다녀야 한다. 가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 가구의 배치가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 내가 있는 이 집은 어떠한가?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집은 어느 건축설계가에 의해 설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설계는 나를 포함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수많은 주민들의 동선을 결정했다. 집이라는 구조가 나의 동선을 결정했고, 나는 좋던 싫던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수리가 가능하겠지만) 이미 주어진 구조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아파트라는 구조도 그렇다. 그것은 단독주택이 아닌 수많은 세대가 함께 사는 단지이다. 층수가 높다. 우리집은 12층이다. 나는 우리집을 들락거릴 때마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유는 하나이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책상이나 의자의 배치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아파트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구조이다. 아파트 내에서의 나의 행동은 그 그조로 인해 거의 영구적으로 결정된다.

의자, 책상, 집, 아파트는 우리 눈에 보이는 구조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구조만 있을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구조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인간처럼 변화무쌍, 예측불가능한 존재가 있을까도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동에는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흔히 우리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변화가 그렇게 쉽다면 변화 때문에 고민하는 개인과 조직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항상 새롭게 변화하고 싶고, 두려움없이 도전하며 매일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돌아보면 매번 제자리 걸음인 것 같은 것이 또 인간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왜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며, 평생을 노력해도 그러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아파트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수 천 마리의 새들이 떼지어 날아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없으신 분을 위해아래 링크주소를 덧붙인다). 그 많은 새들이 동시에 같은 장소를 날면서, 단 한 마리도 부딪치지 않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고기들을 어떨까? 물고기들 역시 수 천, 혹은 수 만 마리가 떼지어 다니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단 한마리도 충돌사고를 내지 않는다(역시 링크주소를 덧붙인다). 언뜻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교통사고를 내는 인간 세상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움직임은 정말 예술의 경지라고까지 할 만하다.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많은 개체들이 마치 하나와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혹시 이들의 움직임에도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혹은 구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행동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은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 구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평생을 가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지상에서 아파트 12층까지 단 번에 오를 수 없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인간이 변하고 싶어도 변화하지 못하고 평생 비슷한 패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의 존재에 아주 강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떼지어 나는 새들: http://www.youtube.com/watch?v=nffdc9sLYnY


떼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 http://www.youtube.com/watch?v=_tGOKngtk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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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은 스포츠 경기와 같다. 인생이라는 경기에 참가한 인간들은 저마다 그 곳에서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친다. 어떤 사람은 스타플레이어가 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후보선수로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인생을 끝마친다. 축구에 비유를 해보자. 축구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경기장이 필요하다. 축구의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경기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경기가 아니다. 축구장 양쪽에는 양쪽 편의 골대가 있으며, 가운데에는 양쪽을 가르는 중앙선이 있다. 축구장은 하나의 구조이다. 그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그 구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경기장 밖에서 골대로 공을 차 넣는다한들 골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 구조를 무시하고서 경기를 펼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어겨서도 안된다. 그것을 어기는 것은 반칙이다. 축구경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훈련에 앞서, 이 경기장이라는 구조와 규칙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네 인생이 스포츠 경기와 같다면, 우리는 구조와 그것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의 삶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명시적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따라야 할 구조와 규칙들이 있다. 구조와 원리를 모르고 하는 게임, 그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삶이라는 게임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신이 알고 있는 변화의 원리는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까지 변화를 위해 삶에 적용해 온 방법들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는가?
삶이 하나의 게임이라면 당신은 그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알고 경기에 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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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에 세멀바이스라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은 분만실에 있던 여성들의 사망률이 끔찍히도 높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근무했던 병동에서 출산하는 여성은 열 명 중 한 명이 죽어 나갔다. 어떤 산모는 이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길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으며, 입원한 산모들 중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빌면서 제발 다른 병동으로 옮겨달라고 애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의사인 세멀바이스는 그 원인을 밝히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굳이 다른 병동과의 차이점을 들자면 세멀바이스의 병동에서는 의사들이 산파 역할을 하는 반면에, 다른 병동에서는 조산원들이 산파 역할을 한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외에는 병동의 모든 요소들을 다른 병동과 동일하게 만들어 결과를 살펴봤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세멀바이스는 다른 병원을 시찰하기 위해 4개월 동안 병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놀랍게도 자신이 담당했던 병동의 사망률이 현저하게 감소해있었다. 그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연구에 몰입했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의사들의 시체 해부가 원인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근무하던 병원은 의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연구소를 겸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연구를 위해 틈틈이 시체를 해부하며 연구와 치료를 병행했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당시에는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어 의사들이 시체를 만진 손을 씻지도 않은 채 산파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산모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산욕열'이라는 병으로, 의사들의 손에 묻은 세균이 주원인이었던 것이다. 세멀바이스는 다름 아닌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의사들의 손에 묻은 세균이 환자들에게 전염되고 있음을 알리고 의사들이 손을 씼는 것을 필수원칙으로 하는 방침을 제정했다. 그 후 산모들의 사망률은 1%로 감소했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했건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떠할까? 살면서 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짓들이, 나와 그들의 인생에 치명적인 해를 미쳤던 일은 없었을까? 나도 모르게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분명히 있었을 것 같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면, 더 나아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면 생각해보면 괜히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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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의 전환에 불을 붙인 경영자들은 버스를 어디로 몰고 갈지 먼저 생각하고 난 다음에 버스에 사람들을 태우지 않았다. 반대로 버스에다 적합한 사람들을 먼저 태우고(부적합한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게 하고) 난 다음에 버스를 어디로 몰고 갈지 생각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을 넘어..>를 보면 '사람 먼저, 다음에 할 일' 이라는 챕터가 있다. 위대한 기업을 영속한 회사들은 하나같이, 무엇을 할지를 따지기 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다. 적합한 사람들을 적합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목숨걸고 지켜야할 원칙 중에 원칙이었다. 그들의 원칙은 언뜻 들어도 충분히 수궁이 가는 말이다. 어쩌면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을 나 자신에게 들이댄다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히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살 떨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한 기준을 남에게 들이대건, 아니면 내가 그 기준을 적용받는 대상이 되건 둘다 마찬가지이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엄격함 이다.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면 과감히 버스에서 내리라고 말해야 했으며, 적합한 사람은 절대 떠나지 못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적합한 사람들만이 올라탄 그 버스는 엉뚱한 곳으로 갈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런 엄격함을 엄격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엄격함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정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엄격함은 비정함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돈하는 경향이 있다. 명확한 분별을 하지 않아, 엄격함을 비정함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엄격함이 없는 곳에서는 모두가 피해자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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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포인트는 버스를 어디로 몰고 갈지 생각하기에 앞서 적합한 사람들을 먼저 버스에 태운다는(그리고 부적합한 사람들을 버스에서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핵심 포인트는 기업을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 키우기 위해 사람을 판별할 때 요구되는, 가차없는 엄격함의 정도이다.

우리 역시 어떤 버스를 타고 산다. 그 버스가 반드시 회사일 필요는 없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탄 버스, 그 버스에 당신은 정말 필요한 사람인가? 정말로 적합한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어떨까?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내 느낌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yes 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남들에게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에게 칼같은 엄격함을 들이댄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그 버스가 가려는 목적지가 내가 가려는 곳과 다를 뿐더러, 내가 그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에게도 손해, 다른 사람에게도 손해.

나 스스로 내가 속한 모든 조직에서 '나는 적합한 사람인가?' 다시 한 번 물어본다. 묻고 또 물어 본다. 대답에 명료함이 서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다. 물론 엄격함을 가진 사람에게 말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 야금야금 피해를 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자라고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타야할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탓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그저 눈을 슬쩍 감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며 안심하고 가슴 쓸어 내릴 일이 아니다. 내가 타지 말아야 할 버스는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해도 내가 탈 버스로 변하지 않는다. 계속 모른다면, 혹은 모른척 한다면 의사 세멀바이스처럼 조직과 자신을 위해서 뭔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결국 조직도 자신도 세균에 감염시켜 중병에 들게 만드는 크나큰 우를 범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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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의 3가지 전제:
셋째, 잠재력을 발휘하고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앞 서 다루었던 코칭의 첫 번째, 두 번째 전제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경계라고 표현한 이원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굉장히 무게가 나가는 어찌보면 다소 심각한 주제들이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전제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이 말은 언뜻 보면 앞에 했던 말과 앞 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으며, 해답 또한 모두 그 안에 있는데 또 무슨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과거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코치들이 먹고 살기 위해 갖다 붙인 말이 아닌가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고 한다. 이 말은 코치들이 자신들의 필요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이는 코칭이 무엇인지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이 세 번째 전제에는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그렇다고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코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 중의 하나인(이건 단지 필자의 생각임)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기만이라는 주제를 상자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우리가 삶에서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엄청난 실수들을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상자를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주 그 상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도 모르는 새에 말이다. 중요한 점은 상자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이 상자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비유적으로만 생각해보다라도 상장 안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며, 자신의 원하는 탁월한 삶을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상자 안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고도의 자기 인식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스스로 자신이 상자 안에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그 집단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사고방식을 공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 살아도 좁지 않을 만큼 커다란 상자를 만들어내게 된다. 잠재력에 대한 상자, 가능성에 대한 상자, 행복에 대한 상자, 성공에 대한 상자가 모두 존재한다.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 안에서 상자 밖의 세상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상자 밖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조차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끼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외국인의 눈에는 낯선 것으로 비춰지는 것과 같다.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경계로 말해보자면, 경계를 긋고 그 중 한 쪽의 입장을 택한 상황이라면 다른 쪽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자신의 허물은 물론이며,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조차도 볼 수 없게 된다. 스스로 지금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관찰구조도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관찰할 수는 없다. 개인은 세계를 지각하고 해석하는 어떤 것으로서 그 수준의 구조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인은 그런 구조들 자체를 전체적으로 지각하고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상위수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각각의 해석과정은 보지만 보여지지 않고, 해석하지만 그 자체가 해석되지는 않으며, 억압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억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켄 윌버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세상을 본다. 나의 잠재력을 보고, 세상의 무수한 가능성을 보고, 널려 있는 가능성을 본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볼 수는 없다. 무엇이든 관찰하는 주체는 자신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은 보고, 무엇은 못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그가 보는 것이 현실이며, 그것이 그에게는 진실이다. 상대방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내 눈에는 쉽게 보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가능성과 기회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세상에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들이 널려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선택의 기회를 보기는 커녕 지금 이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불만을 토로하기 일쑤이다. 정말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결코 보지 못하는 곳이 있는 것은 아닐까?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흔들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성공과 부를 성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분명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볼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코치는 다른 관점에서 업무를 바라보고 이를 코치 입장에서 설명하여 함께 문제 접근 방식을 의논하는 것이다" - 에릭 슈미트.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는 코칭을 받아보라는 소리를 처음 듣고 서는 화를 냈다고 한다. 자신처럼 일을 잘하는 사람이 무슨 코치를 받느냐는 생각에서 였다. 이는 코칭이 무엇인지, 코치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우리는 어디가서 코칭을 좀 받으라는 말을 들으면 에릭 슈미트가 이해한 뜻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대부분 그런 뜻으로 말한다. 하지만, 에릭 슈미트는 코칭 경험하고, 코치의 필요성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관련 영상을 이안나 코치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http://coachingisland.com/257) 코치가 하는 일은 어디로 가라고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고객이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앞만 보고 가는 고객이 뒤도 보고, 옆도 보고, 위, 아래를 쳐다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가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곳을 보는것, 그것이 바로 가능성과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예전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파트너로서의 코치가 필요한 것이다. 결코 몰랐던 세상, 몰랐던 차원이 존재함을 깨닫기 위해서 코치라는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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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의 3가지 전제:
두번째, 문제의 해답은 바로 문제를 지닌 그 사람 내부에 있다.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전 국민을 흥분시켰던 드라마 한 편이 떠오른다. 박신양, 김정은 주연의 파리의 연인. 1회를 보고나서 재미있다 싶으면, 결국 전 편을 다 보고 말아야하는 몹쓸 습관이 있었던 나는 그 드라마 역시 전 편을 다봐야만 했다. 그러나 마지막회에는 예상치 못했던 참으로 아리송한 결말에 큰 허무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드라마였다. '애기야~'를 연신 외쳐대며 핑크 돼지 저금통을 들고 브라운관을 누비던 한기주(박신양)의 멋드러진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드라마에서 최고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형수가 될 태영(김정은)에게 품어서는 안될 마음을 품었던 한기주의 동생, 윤수혁(이동건)의 고백장면이 아닐까? 그 장면에서 그가 태영에게 던진 기가막힌 대사 한 마디는 당시 대한민국 뭇여성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리기에 충분했었다. 바로 '이 안에 너 있다'.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며 그런 엄청난 멘트를 날리던 그의 모습은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매력적이기 그지 없었다. 한 동안 그 한 마디는 전국민적인 유행어였었음을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코칭이라는 것을 안지 얼마되지 않아 이 대사 못지 않게 기가 막힌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코칭의 3가지 전제 중 그 두번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내 안에 있다'가 그것이었다. 어찌보면 뻔한 말인 것 같으면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아리송하고 어떤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오묘한 문장이었다. 어쨌든,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내 안에 있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 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가슴 뛰게 만드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문제는 나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 혹은 환경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 또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말해 그것이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생긴 문제라면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 또한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고, 그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이는 모든 문제를 만들어낸 원인은 당신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 안에 해답이 있으니,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대단히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코칭에서는 이렇게 문제의 답은 내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이 두번째 전제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의 과정을 함께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전제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들은 설명은 바로 인간의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매순간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방대한 향의 정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에 쌓아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에 비유된다.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빙산의 일각을 우리의 의식에, 그리고 바다 속에 잠겨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밑부분을 흔히 우리의 무의식에 비유한다. 그 무의식의 영역은 무한한 정보와 잠재력이 저장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코치는 그 사람이 스스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코치는 그것을 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이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그 거대한 무의식에서 건져낼 수 있도록 말이다. 코칭을 통해 그곳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찾는 '해답'이다. 이러한 설명 또한 매력적이었으며 큰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칭을 직업으로 삼은 나로서는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 전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할 때, 먼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곧바로 해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한시라도 빨리 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항상 답을 찾는 것에만 혈안이 되기 쉽다. 우리는 학창시절 선생님께 자주 듣던 말이 하나 있다. 수 많은 시험을 볼 때마다 매번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바로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 답은 항상 문제 속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답을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문제와 답은 입자와 파동의 모습을 함께 지닌 소립자와 같이 인간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인 듯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답을 찾아 나서기 이전에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문제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의미도 가능하면 껍질을 벗길대로 벗겨 가장 속 알맹이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문제라는 것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문제는 항상 밖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내 안의 관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이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이다. 관점은 곧 입장을 만들어낸다. 입장은 경계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함에 의해서 발생한다. 결국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입장을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관점을 놓아버림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입장 혹은 다른 관점을 취하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다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일 뿐, 놓아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기계발 서적에서는 오로지 관점의 전환만을 외쳐댄다). 이는 곧 그러한 관점을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해답도 결국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고 있는 내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궁극의 해답은 결국 나도 모르게 그어져 있던 경계를 포기하는 것, 경계를 통해 갖게 된 나의 관점을 놓아버리는 것 뿐이다. (짧은 글로 핵심을 전하려 하다보니 양적인 설명이 부족함을 느낀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설명을 원한다면 켄 윌버의 '무경계' 또는 '의식의 스펙트럼'을 읽어보길 권한다)

경계를 지키면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며, 그 상태는 그저 문제의 일시적인 해결, 또는 문제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와 관련된 다른 문제가 바로 뒤따라오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겪는가? 취업난으로 취직이 그 옛날 장원급제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회사를 나올 날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나서는, 나중에 그 직장을 떠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돈을 내고 코칭을 받는다. 이런 상황은 삶에서 수도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로 우리가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진짜 해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한참 뒤늦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완전한 탈출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근본적인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씨앗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사랑하는 그녀가 아닌, 경계이다. 그것이 곧 내 안에 있는 유일한 문제이자, 동시에 유일한 해답이 아닐까? 문제와 해답이 모두 내 안에 있음을 진정으로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필요가 있다.

p.s: 그리고,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그 명장면을 다시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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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의 3가지 전제:
첫번째,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코칭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 분야의 공통된 전제이기도 하다.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 그것을 계발하기 위해서 애쓸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당신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 또는 느낌이 드는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반발을 했다. 누구나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끄집어 내어 쓸 수 있는 방법을 모르니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 또는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한 번도 써본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다. 있다고는 말하지만 사실 없을지도 모른다 등등. 이와 같은 말들을 많이 들었다.

'나도 정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선 여기서 말하는 잠재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잠재력이 왜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 의미에 대해 우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들을 보면 '당신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니, 그걸 믿고 저질러라'라고 외치지만, 정작 그 잠재력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열정? 용기? 끈기? 의지력? 천재성? 그 잠재력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잠재력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그 잠재력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 즉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몸뚱이만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먼저 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몸은 여러가지 요소들로 구성이 된다. 뼈와 관절이 있고, 장기가 있고, 혈관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세포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들은 또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다른 물질들과 그 구성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분명 인간은 물질 그 이상의 존재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The Great Chain of Being. 존재의 대 사슬, 이름도 거창한 이 그림은 내가 진정으로(곱하기 100을 해도 좋을 만큼) 존경하는 켄 윌버의 책에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림을 잠깐 설명하려 한다. 간단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탁월한 도해이다. 가장 안쪽의 원은 물질Matter을 뜻한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을 연구하는 학문은 바로 물리학Physics이다. 그런데 인간은 분명 물질 그 이상이다. 인간에게는 바로 생명Life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생명을 가진 물질이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생물학Biology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파리도 모기도 아메바도 생명을 가진 물질일텐데, 인간이 그들과 같은 수준일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인간에게는 마음Mind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심리학Psychology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발짝 더 나아간다. 인간에겐 바로 쏘울Soul, 영혼이 있다. (힙합 가수들이 흔히 "그 친구는 쏘울이 있는 친구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쏘울과 이 쏘울이 같은지는 모르겠다) 눈에 결코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은 분명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이를 연구하는 학문은 신학Theology이다. 그런데 이것로도 부족하다. 끝으로 한 단계가 더 있다. 바로 정신Spirit이다. 이 정신은 앞서 논의한 모든 것의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긴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한다.

이 그림을 바탕으로 보자면, 인간은 모두 5가지의 차원을 지닌(혹은 차원에 속한) 존재이다. 차원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각 수준이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생명을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을 필요로 한다. 몸이 없는 인간이 있을리 없을테니 말이다. 혹은 있다한들 그를 인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물질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단순히 물질의 합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 모여 창발을 일으키고,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생명체이다. 생명은 물질의 합 그 이상이다. 바로 그 이상이라는 것은 '초월'을 뜻한다. 초월은 하위 단계를 포함하면서 그 이상의 수준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 차원을 넘어 5개의 차원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이제야 우리가 본래 생각하려 했던 잠재력에 대해 생각해 볼 때이다. 각각의 차원에 있는 존재는 모두 그들 고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물질의 차원에 속하는 원자 하나에도 얼마나 큰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는지는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2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생명의 차원에 있는 존재 역시 그들 나름대로 생명력이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의 생각, 감정이 어떠한 힘을 갖는지 보고 싶다면, 유명한 6부작 다큐멘터리 '마음'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음'은 책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이정도까지만 이야기하면 이제 서서히 새로운 단어하나가 눈에 띠기 시작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바로 에너지이다. 우리가 가진 잠재력은 바로 이 에너지라는 키워드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며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한다. 그 에너지는 단지 육체적인 힘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정확히 말로 뭐라할 수 없어도 분명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자신이 위의 5가지 차원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부분 영혼의 단계이거나 마음의 단계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살아갈 것이다. 자신을 그저 생명이 있는 몸뚱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연료(먹을 것)만 채워지면 그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건 상관없이 우리는 존재의 대 사슬의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영역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인 에너지, 그 모든 에너지가 바로 우리가 가진 잠재력이다. 당신이 한낯 자신을 마음의 차원, 그 중에서도 아주 일부에만 속한 작디 작은 존재로만 인식한다 하더라도 당신 안에 잠재된 그 에너지는 절대로 어디로 가지 않고 언제나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코칭은 바로 당신안에 잠자고 있는 이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일이다. 두꺼운 지각을 뚫고 들어가 지구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석유를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석유를 찾기 위해 땅을 뚫고 내려가는 이유는 단 하나 아닌가? 그곳에 석유가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치를 잘못 잡아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그 큰일을 벌이지 않는다. 코칭도 마찬가지이다. 숨겨진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결코 코치도 고객도 코칭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우리 안에는 항상 폭발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잠재력의 화산이 숨어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에, 코칭이 존재할 수 있으며, 코칭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 http://wilber.shambhala.com/html/books/kosmos/excerptG/part1.cfm/

"Hello, World" 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한 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밍 언어(progamming language) 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Pascal, COBOL, C, C++, JAVA, JSP, ASP, PHP, Ruby, Python 등 프로그래밍 언어는 그 종류가 수십 종에 달할만큼 다양하다. 어떤 언어든지 처음 배우면서 공통으로 시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Hello, World'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실행했을 때 화면에 "Hello, World"라는 문장을 출력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마친다. 그야말로 프로그래밍의 첫 걸음마를 떼는 간단한 프로그램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cearta.ie/2007/01/hello-world/

코칭에도 이 Hello, World와 비슷한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바로 '코칭의 3가지 전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이나 훈련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말들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모두 이 3가지 전제를 기반으로 해서 코칭의 근본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 3가지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문제의 답은 바로 문제를 지닌 그 사람 내부에 있다.
셋째, 잠재력을 발휘하고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럼 Hello, World 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이 이야기를 왜 또 하려는 것인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가장 처음에 배우는 것들, 기본 중의 기본, 단순한 것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고수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가장 기본적인 것의 의미를 진짜로 알고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대답하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은 바로 "코칭이 무엇이가요?"라는 질문이다. 코칭을 시작한 후부터 수 없이 받아온 질문이고 매번 그 당시의 나의 이해 수준에서 적절한 답변을 해주지만, 항상 내가 정말 코칭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라는 꺼름직한 의문이 뒤따라온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 3가지 전제도 그 진정한 의미를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오랜 시간 학습을 하고 연구를 거듭하면서 이것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져 간다는 것을 느낄 뿐이지 아직도 내가 이것의 진의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에 대해 더 자주, 그리고 더 깊이 탐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를 제대로 알면 무엇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코칭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하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단지 코치 뿐만 아니라 코치이(고객)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코칭도 마찬가지이다. 코칭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둘째치고,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코칭인지 코칭이 아닌지도 모른채 코칭을 한다고 하는 크나큰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지금도 너무나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코칭이 아닌 것을 하며 코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코치들 사이에서 유사코칭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이니 말이다.

코칭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리더십의 새로운 대안으로 코칭을 언급하고 있다. 당연히 여러 코칭회사를 통해 많은 수의 코치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그들은 기를 쓰고 코칭을 잘 하기위해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그런데, 정작 코칭이 무엇이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탐구를 하는 사람은 많이 보질 못했다.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부실공사가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말이다. 코칭의 3가지 전제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코칭,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코칭이고, 무엇이 코칭이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기기 힘든 게임

코칭/자기계발 2010/01/26 01:20 Posted by 최코치

"의지력이란 에고 또는 페르소나 편에서 다른 것들을 추구하는 와중에 유기체 또는 환경적인 면들을 억제하려는 선형의 일치된 노력이다." - 켄 윌버 Ken Wilber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 자기계발계에서는 이에 대해 아주 명쾌해(?) 보이는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 답은 바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나약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기자신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켄윌버의 한 마디는 이러한 해답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매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의지력은 자신의 다른 쪽 면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용기라고 이름 붙인 의지가 필요했던 것이며, 무기력한 나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열정이라고 이름 붙인 의지가 필요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게임에 반드시 승,패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도 질 수 밖에 없는 게임도 있습니다.

언어,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

코칭/자기계발 2009/12/03 22:30 Posted by 최코치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언어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울 때가 많다. 언어로는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을 듣는이에게 명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바닥에 깔려있어서인지, 나에게는 항상 그것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다. 한정된 언어와 상징체계, 그리고 그 한정된 것 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나의 어휘, 언어구사능력을 등에 없고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내가 아는 것, 내가 느끼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전달하는 의미 자체도 대략 그러할 뿐, 정확하지 않은채로 말이다. 이는 나의 언어구사능력이 떨어지는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언어가 같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언어와 상징들이 우리의 삶을 상당부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 한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른 언어라 함은 세계 각국의 언어가 아닌,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설명하는 다른 언어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세계적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400년 전만 해도 모든 악천 후와 모든 질병, 정상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마녀의 소행으로 치부되었다. 오늘날에는 분자생물학자와 기상학자들이 불과 몇 백년 전만 해도 너끈히 여자들을 화형시킬 이유가 되었을 일에 대해 설명해준다."

과학이라는 언어가 인간이 예전에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갖게 해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가진 한계이면서, 그것이 갖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학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갖게 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경계가 극도로 확장된 것이다. 실재 Reality는 달라진 것이 없을텐데,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사람이 목숨이 왔다갔다는 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양자론, 카오스이론, 운동역학과 같은 과학의 언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근원은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의 이해의 폭을 빠른 속도로 넓혀주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일이 기존의 종교나 신비주의의 언어가 아닌 과학의 언어로 가능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렇듯 언어는 단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의 역할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의 근간을 이루며,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는 결정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잘 생각해보면 단어 하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혹은 그 단어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있어서도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는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다. 내가 하고 있는 '코칭'이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이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물론 이 '때'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The 15 Coaching Proficiencies are a distillation of over 20 years work by hundreds of coaches. Originally developed by Thomas Leonard and Susan Austin, the 15 Proficiencies were tweaked and perfected by the CoachVille R&D Team of 1,000+ coaches over a year period.



이 문서를 도대체 몇 번을 읽어야 할까? 몇 번을 읽으면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몇 번을 읽으면 문장 하나하나에 숨어있는 깊은 뜻들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을까? 꽤나 여러 번 읽었건만, 읽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문서이다. 개인적으로는 웬만한 코칭교육과정에 참가하는 것보다, 이 문서를 진지하게 반복해서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문서 역시 앞서 리뷰했던 ‘라이프코칭 가이드’와 같이, 기술 그 이상의 것들을 상당 분량 담고 있다. 첫 번째 기술로 소개하고 있는 ‘열정적인 대화에 끌어들이기 Engages in provocative conversations’의 세부내용을 보자면,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말하지 않은 것을 듣기 Listen for the unsaid’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이 어찌 단순한 기술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 몇 번 연습해서 익힐 수 있는 기술 technique 그 이상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서는 이렇게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기술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것을 연습하는 방법은 물론이며,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질문 목록, 그 기술을 쓸 때 코치들이 하는 대표적인 실수들, 그 기술이 제대로 효과를 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방법 등 그야말로 프로 코치들이 가져야 할 태도와 기술에 관한 모든 것을 아주 명쾌하게 제공하고 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기술에 앞서 코치들이 가져야 할 자세나 태도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이러한 것들이다. 고객을 즐기기 Enjoys the client immensely, 진리를 즐기기 Relishes truth, 고객의 인간성을 존중하기 Respects the client’s humanity와 같은 것들로 이런 것들을 단순히 코칭 기술이라고 하기에는 범위를 너무 한정짓는 느낌이 있다.

정말 멋지지 않는가? 사실 이런 것들이야, 코치라면 누구나 감으로 이래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것들을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명확한 분별 distionction 을 제공하며, 그것을 익히고 활용하는데 필요한 세부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치있는 내용을,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여 제공하는 자료는 접하기 쉽지 않다.

사실 문서 안에 제공되는 다이어그램을 비롯해, 이 문서의 내용만으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읽을수록 그 가치를 더 깊게 인식하게 할 뿐아니라, 그것의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쾌감을 안겨주는 멋진 자료임에 분명하다.